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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남가주 한인연극 초창기와 ‘모임극회’

남가주 한인사회 연극의 역사를 정리하다 보면 첫 부분에서 ‘모임극회’라는 단체를 만나게 된다. 젊은이들이 모인 순수한 극단이다. ‘모임극회’의 첫 공연작품은 이근삼 작, 김석만 연출, 박무영 박준성 기획의 ‘유랑극단’으로 1978년 7월29일-30일, LA에서 공연되었다. 백광호, 장태한, 박대영, 김낙인 등 30여명이 열연한 이 연극은 유랑극단의 떠돌이 삶이 고달픈 이민생활과 묘하게 겹쳐지면서 많은 공감을 얻었다.   이 공연 이전의 연극으로는, 남가주 한인연극동인회(회장 이평재)가 유치진 작, 황영애 각색, 이평재 연출 ‘처용의 노래’와 김시몬 작, 이평재 연출 ‘우수의 계절’을 1976년 9월30일, 공연했다는 기록이 전부다. (내가 이민 오기 전의 일이라서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남가주 한인연극동인회’의 공연은 이 한편으로 그친 것 같다. 이에 비해 ‘모임극회’는 창단 공연 이후 해마다 공연을 이어가면서, 김지하 작 ‘금관의 예수’, 황석영 작 ‘돼지꿈’ 등을 공연했다. 이어서 80년대에 들어서, 한국에서 연극을 했던 전문연극인들의 ‘재미한인연극인협회’나 젊은 연극인들의 단체인 ‘극단 1981’ 등을 창단하고, 소극장들도 생기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면, 남가주 한인 연극의 기초는 젊은이들의 자생적 극단에 의해 다져진 셈이다. 그 중심에는 연출가 김석만이 있었다. 서울대 문리대 연극반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다가 가족이민으로 미국에 온 김석만은 당시 LA커뮤니티칼리지(LACC)에 다니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모임을 만들어 함께 세상 공부도 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고국의 학생들을 돕고, 절친 김민기가 한국에서 하는 야학을 돕기도 하면서 차근차근 결속을 다졌다. 그렇게 몇 년간 바닥을 다진 뒤에 자연스럽게 극단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 모임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았다. 그 풋풋하던 젊은이들이 이제 서로 건강 걱정을 하고 손주 자랑을 하며 낄낄거리는 나이가 되었다. 그 ‘나이 먹은 젊은이’들이 모여 50주년 기념 잔치를 열어 추억의 꽃을 피우고, 김민기의 노래를 듣고 함께 부른다. 참 보기 좋다.   그리고, 연극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김석만은 한국의 대표 연출가 중 한 사람이 되었고, 대학교수로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모임극회’는 젊은이들의 극단답게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에 보탬이 되는 연극을 공연했다. 예를 들어, 두 번째 공연작인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는 당시 미주한인사회의 큰 관심사였던 이철수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이철수 구명운동에도 적극 동참했고, 손튼 와일더 작, 정호영 연출 ‘우리 읍내’는 백광흠 구명운동을 위한 공연이었다.   또한, 사이구 LA폭동 다음 해인 1993년에 공연된 ‘민들레 아리랑’은 폭동에 대한 미주 한인들의 생각과 바람을 분명하게 보여준 연극으로 화제를 모았다. 영어 제목은 〈LosT Angeles〉로 매우 상징적이고 날카로운 풍자다.   장소현 원작, 김석만 연출로 무대화된 이 작품은 LA시가 운영하는 극장에서 우리말과 영어 이중언어로 공연되어 매우 바람직한 공연 형태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연극 제작과정에서도 연극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폭동에 대해서 진지하게 공부하고, 실제로 폭동을 겪은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공동창작으로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거쳤다. 그렇게 해서, 절실한 현실감각이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강렬한 무대가 만들어졌다.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다.   마지막 장면, 출연자들이 모두 나와 김민기의 ‘철망 앞에서’를 합창하던 모습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자 총을 내리고 두 손 마주 잡고 힘없이 서 있는 녹슨 철조망을 걷어 버려요.”   ‘모임극회’의 다음 공연을 기다린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한인연극 초창기와 남가주 한인연극동인회 남가주 한인사회 연출가 김석만

2024-10-31

[문화산책] 우리 사회의 시각적 표정

남가주 한인사회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인 이상모 씨가 ‘Logo LA+plus’라는 제목의 흥미롭고 의미도 깊은 책을 발간했다. 그가 지난 50여년간 디자인한 수없이 많은 기업체, 회사의 로고, 심볼 마크 디자인 중 234점을 엄선해서 실제 사용사례와 함께 소개한 아담한 책이다.   이상모 씨는 남가주 한인사회 광고와 그래픽 디자인 분야의 터줏대감이자 산 증인이다. 50년도 넘는 긴 세월을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고집스럽게 외길을 걸어왔고, 지금도 현역으로 활약하고 있으니 감탄스럽고 존경스럽다.   이 책은 한 디자이너의 작품집이라는 의미를 훨씬 넘어서서, 남가주 한인사회의 성장 과정, 특히 경제 발전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자료로도 가치를 갖는다. 기업체와 회사의 변화무쌍한 흥망성쇠를 구체적인 조형을 통해 실감 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책에 실린 작품들을 보노라면 “아, 옛날에 이런 회사가 있었지…로고를 보니 생생하게 기억나네”라고 기억을 되살리게 된다. 바로 이것이 디자인의 힘이다.   한 사회의 미의식이나 품격을 보여주는 시각적 요소는 다양하지만, 그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생활 속의 미술들이다. 크게는 도시계획부터 작게는 점포의 간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광고나 다양한 인쇄물에 이르는 그래픽 디자인들….그런 시각적 요소들은 사회의 수준을 보여준다.   기업을 위한 그래픽 디자인이나 광고 디자인은 그 사회의 역사, 특히 경제 상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부분의 역사를 살펴보고 갈무리하는 작업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흔히 상업적 광고 디자인 작품은 소비되어버리고 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한 사회, 한 시대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다.   미국 내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LA코리아타운은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중반에 이르는 기간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민의 활성화로 한인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상권이 형성되고, 한국 대기업이 지사를 개설하고, 언론사도 문을 열고, 한인 은행 같은 규모가 큰 업체들이 설립되면서, 수준 높은 디자인에 대한 요구도 생겨났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광고기획사들이 문을 열고,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활동도 본격적으로 활발해졌다. 대부분 한국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이민 온 전문가들이 사무실을 열고 활동했는데, 많은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수준 높은 디자인 작품을 남겼다. 디자이너 이상모 씨는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대표적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초창기부터 활약하던 디자이너 중 아직도 현역으로 작업하는 작가는 이상모 씨가 거의 유일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한인사회 초창기의 그래픽 디자인 자료들은 별로 남아있지도 않고, 제대로 정리되지 못했다. 특히 컴퓨터를 사용하기 이전의 자료들은 없어져 버린 것이 많다.   이런 현실에서 이상모 씨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신의 작품을 깐깐하게 갈무리하고 정리해 놓아서, 그 작품들을 통해 한인사회 디자인 역사의 한 모습을 읽을 수 있다.   흔히 남가주 한인사회를 평할 때, ‘서울시 나성구’라고 불릴 정도로 한국사회의 판박이, 그것도 변두리 수준의 베끼기라고 평가하는 시각이 많은데, 그것은 그릇된 편견이다. 실제로 살펴보면 그 시대 우리 사회의 특성이 잘 녹아 있고, 한국의 장점과 미국사회의 좋은 점이 조화 융합을 이루거나, 한국적 가치관에 미국적 정신세계를 더한 바람직한 예들도 적지 않다.   이상모 씨의 그래픽 디자인 작품들도 그런 긍정적 사례에 속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래서, 더욱 소중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문화산책 사회 시각 그래픽 디자인들 한인사회 디자인 남가주 한인사회

2024-10-24

한국 중견기업들 동참…대기업은 뭐하나

미국에 진출한 한국 중견기업이 한인사회 발전을 위한 자선사업에 동참해 눈길을 끈다. 한인단체들은 최근 한국 기업이 한인사회 환원사업에 긍정적이라며, 삼성과 LG 등 대기업 참여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남가주 첫 한인 커뮤니티 재단인 미주한인재단(KAF·이사장 강창근, 이하 한인재단)은 지난달 28일 캘리포니아 클럽에서 ‘파운더스 모임’을 열고, 현재까지 10만 달러 이상 기부자가 50여명으로 늘었다고 밝혔다.     한인재단 측은 올해 안에 1차 목표인 ‘파운더스 서클(Founders Circle)’ 멤버 100명 유치에 힘을 모으기로 했다.     한인재단은 한인사회 발전과 복지향상을 위해 자선기금을 신뢰성있게 관리하는 남가주 한인사회 첫 ‘커뮤니티 파운데이션’이다. 지난 2018년 설립돼 2023년 35만 달러 기부 등 지난 3년 동안 20여 비영리단체에 총 116만 달러 그랜트를 지원했다.     특히 이번 파운더스 모임에서 강창근 이사장은 한국 중견기업인 ▶삼익악기(회장 김종섭) ▶포장용 플라스틱 성형기업 동진 아메리카(지사장 에릭 송) ▶부동산 개발 및 시행사 시티원(회장 차준영)이 각각 10만 달러를 기부한다고 밝혔다.     강창근 이사장은 “남가주 지역에도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처럼 한인사회를 위한 커뮤니티 재단이 활동하고 많은 분이 동참한다는 사실을 알렸다”며 “각 기업 측에서 취지에 흔쾌히 공감하고 기부금을 약정했다”고 말했다.     한인재단에 따르면 기부금 약정 기업 모두 미국에 지사를 두고 있다. 이들 기업은 미국 시장에 진출하며 한인사회와 상생발전을 위한 협력을 약속했다고 한다.   강 이사장은 “미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한인사회와 밀접한 관계일 수밖에 없다”며 “이들 기업이 한인사회 발전과 복지향상에 협조하면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 재단이 활발히 움직이고 신뢰를 쌓으면, 한국 기업도 많이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인단체에 따르면 한국 기업은 업종별로 한인사회 환원에 온도차를 보인다고 한다. 자동차와 항공사 등 한인 고객층이 두터울 경우에만 커뮤니티 환원에 나서는 모습이다. 삼성과 LA 등 대기업이 미국사회 홍보와 환원에만 집중하는 방식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LA한인상공회의소 김봉현 회장은 “한인사회가 미국 진출 한국 기업을 응원하고 제품도 많이 사지만, 기업은 아직 한인사회 중요성을 크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면서 “한인사회 후원 요청 등 나름 많은 공을 들이고 접근해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답변만 온다”고 전했다.     김 회장은 이어 “한인사회 존재와 중요성을 한국 기업에 알리는 일도 중요하다. 커뮤니티 행사 때 기업 관계자를 초청하고 우리를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한인재단은 한인사회 발전사업에 동참할 후원자를 찾고 있다. 파운더스 서클에는 데이빗 리(제이미슨그룹 회장), 강창근(엣지 마인 대표), 잔임(변호사), 김영석(3플러스로직 대표), 브라이언 김(터보 에어 대표), 이진우(M3 대표, PCB설립이사), 토머스 한(치과의), 브라이언 정(허브 시티보험 대표), 로빈 김(한미장학재단 및KAFA 이사), 신영신(시니어&노인센터 이사장), 영 김(LA한인회 이사장), 양중남(전 코리아타운 플라자) 등 5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문의:info@koreanAmericanFoundation.org       김형재 기자 kim.ian@koreadaily.com한인사회 미국 한인 미주 한인 캘리포니아 로스엔젤레스 LA 로스앤젤레스 한인사회 환원사업 남가주 한인사회 한인사회 발전

2024-03-03

‘소통과 공감’…남가주 홍대 미대 동문전

남가주에서 50년 동안 작품 활동을 해온 원로작가부터 LA와 오렌지카운티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현역 중견 작가까지 개성 있고 깊이 있는 다양한 작품을 한 곳에서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린다.     페이스 에이 갤러리는 제23회 남가주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문전을 내달 2일부터 16일까지 개최한다고 밝혔다.     1982년에 결성된 남가주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문회는 40여년에 걸쳐 해를 거듭할수록 규모와 전시의 질적인 성장을 통해 남가주 한인사회에서 주목받는 대표 문화행사로 자리잡고 있다.     남가주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문회(회장 지현)는 “LA와 오렌지카운티 미술계에서 활동하고 입지를 다진 작가들과 창작의 끈을 놓지 않고 틈틈이 작품을 만들어 온 회원들이 함께 마련하는 예술축제의 장”이라고 밝혔다. 이어 “우리의 삶에 그림은 ‘소통과 공감’의 의미로 그림을 통해 관객과 작가가 서로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고 나아가 삶속에 타자의 생각을 포용하고 이해하는 순기능이 있다”며 “작가들이 전시를 통해 작품을 발표하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이번 전시회에는 동문 작가들이 대거 참여해 추상화, 구상화, 도예, 직조, 풍경화, 설치작업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55~60여점을 선보인다.     남가주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문회 지현 회장은 “동문전이 규모와 작품 수준에서 지역 사회에서 주목하고 있는 전시회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며 “미술애호가들에게 좋은 문화적 체험의 기회가 될”이라고 말했다.     이번 23회 남가주 홍익미술대 동문전 참여 작가는 강태호, 고필종, 공경연, 김미경, 김명실, 김옥순, 김연숙, 김진실, 김홍선, 김희정, 김혁재, 김형주, 다니김, 문두현, 미셸오, 박재진, 변혜수, 서주연, 유제화, 유혜숙, 윤인경, 이부남, 이수완, 이종남, 이혜숙, 임희안, 장인경, 정은실, 조분연, 조소연, 조현숙, 지현, 최영주 등 33인이다.     이번 동문전이 개최되는 페이스 에이 갤러리는 LA 다운타운 LA 페이스 마트몰에 있으며 약 2000 스퀘어피트 규모로 작품 전시 및 복합 문화공간이다.     오프닝 리셉션은 내달 2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진행된다.     ▶주소:1458 S.San Pedro St. #320, LA   ▶문의:(213)700-9203 이은영 기자남가주 동문전 남가주 홍익대학교 동문전이 규모 남가주 한인사회

2023-08-27

'한인사회 어른' 민병수 변호사 별세

'남가주 한인사회의 어른' 민병수 변호사가 1일 오전 8시 별세했다. 향년 90세. 민 변호사는 최근 폐렴이 악화해 치료를 받아왔다.  1933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5살 때 아버지인 고 민희식 초대 LA총영사를 따라 가족과 함께 LA에 왔다. 1975년 캘리포니아주에서 한인으로는 세 번째, 남가주에서는 두 번째 변호사로 합격한 후 48년간 형사법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한인 커뮤니티의 대들보이자 맏형 역할을 마다하지 않던 그는 1983년 남가주한인변호사협회(KABA)를 설립했으며, 현 한인타운청소년회관(KYCC)의 전신인 한인청소년센터(KYC) 이사(1975~83년)로 있으면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LA카운티 산하 법률위원회 첫 한인 커미셔너(1983~87년)이기도 했으며, LA폭동 이후에는 한미법률재단(KALAF) 회장을 맡아 폭동 피해 업주들을 위해 소송을 제기했다. 2004년 미주 한인의 날 제정과 한인타운 내 찰스 김 초등학교(2006년), 김영옥중학교(2009년), 새미리초등학교(2013년) 이름 명명에 앞장섰다. 또 세계한인교육자총연합회(IKEN) 초대 회장( 2010년), 애국동지회 고문(2013년)을 역임하며 한인 사회에 공헌했다.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2001년), 재미동포 첫 대한민국 법률대상(2009년), 세계한인검사협회 주최 평생공로상(2018년), 남가주한인변호사협회 주최 개척자상(2018년) 등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캐롤 민씨와 장남 크리스 민, 차남 티모시 민씨가 있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민병수 변호사 남가주한인변호사협회 주최 어른 민병수 남가주 한인사회

2023-06-01

315페이지에 담은 50년 전 한인 역사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이다. 1972년은 남가주 한인사회의 변곡점이었다. 그해 2월, USC 인근 옛 동지회 회관에 ‘무궁화 학원(현 남가주 한국학원)’이 문을 열었다. 두 달 후 대한항공은 서울-LA 노선의 첫 운항을 시작했다.   ‘한인회’란 명칭도 이때 처음 생겨났다. 당시 남가주한인거류민회에서 새롭게 간판을 바꿔 단 남가주 한인회는 첫 주력 사업으로 ‘한인록’을 발간했다. 그해 11월 2일이었다. 한인회가 선보인 최초의 한인록이었다. 한인록 발간은 한인 이민 역사의 자부심이었다. 당시 남가주 한인회 조지 최 회장은 발간사에서 “한인록이 교포 사회의 길잡이가 되고 서로 친교 하는데 다리가 되길 바란다”며 “그 힘으로 ‘제2의 한국’을 이 땅에 세우는 데 이바지한다면 그 사명을 다 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본지는 UC리버사이드 도서관에 보관돼 있던 당시 한인록을 장태한 교수로부터 입수했다. 한인록은 50년 전 미주 한인 사회를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다. 누런 종이 위 흑백 광고들은 ‘1972년’을 살아갔던 한인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인록 제작은 당시 한인사회의 염원이었다. 남가주 한인회 조지 최 회장은 발간사를 이렇게 적었다. “한인록 한번 만들어내자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일의 방대성과 소요자원 조달의 난관으로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 교포 여러분의 지원과 협조를 얻어 밤낮으로 애써 온 결과 마침내 책자를 내놓게 됐다”. 당시 소상영 LA총영사(4대 공관장)는 축간사를 통해 “10년 전 수천 명에 불과했던 나성지역 교민 수가 이제는 약 4만 명에 이르는 대가족이 됐다”며 “이러한 대가족이 협동 단결하여 소수민족 사회의 모범이 되고 미국 사회에 적극 진출해 한민족의 우수성과 유용성을 과시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한인록은 총 315페이지다. 크게 ▶업소록(500여 업소·기관·단체) ▶인명록(약 4800여 명)으로 나뉜다. 쉽게 말하면 미주 한인 사회판 ‘화이트 페이지(인명별 전화번호부)’와 ‘옐로 페이지(업종별 전화번호부)’인 셈이다. 한인록 편집은 당시 키스프린팅을 운영하던 김광제씨가 맡았다. 김씨는 편집후기에서 “5개월간 밤낮으로 일해온 보람이 있다. 하지만, 교포들의 주소 이전이 잦고 자료 근거가 불명확하여 완벽한 주소록을 내놓지 못한 부분이 있다”며 “정확하지 못한 아쉬움을 느끼나 이것이 연례사업이 되어 해를 거듭할수록 보다 완벽한 책자가 되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인록의 첫 전면광고(15페이지)는 대한항공이다. ‘라성-서울 직행’.   미주 여객 노선 취항 첫해인 만큼 한인록의 첫 전면을 차지하고 있다. 굵직한 볼드체로 적힌 전화번호(213-484-1900)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대한항공 미주 지역 서비스센터 번호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 미주 한인사회와 비교하면 규모만 작을 뿐 여행사, 보석상, 리커스토어, 마켓, 언론사, 술집, 비영리단체, 렌터카 업체, 극장 등 없는 게 없다. 한인록을 업종별로 분류해봤다. 먼저 금신엔터프라이즈(LA), 반도무역(LA), 대화물산(샌타모니카), 동양물산(가디나) 등 무역 관련 회사가 77개로 가장 많았다. 가발 업소는 총 57개로 두 번째로 많다. 그만큼 가발업이 당시 한인들의 주요 사업 종목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세번째는 요식업이다. 대원각(LA), 이화원(LA), 최가네 식당(컬버시티), 왕관식당(LA) 등 총 24개의 식당이 한인록에 수록됐다. 이어 식료품점 및 마켓(20개), 리커스토어(11개), 태권도장(12개), 기계 수리 업소·회계사 사무실(각각 11개), 여행사(10개), 보험사(9개), 전자 제품 출장 수리 업체(9개), 미용실·봉제업체·병원(각각 7개), 트로피 제작·양복점·부동산·인쇄소(각각 6개), 차량 정비소·사진관·자동차 딜러·한의원·꽃집(각각 5개), 건축 업체·옷가게(각각 4개), 치과·술집·트럭킹 회사(각각 3개) 등의 순이다. 이때도 교회는 한인사회의 중심축이었다. 한인록에는 동양선교교회, 한인연합감리교회 등 교회(44개) 및 교계 단체(10개) 등 총 54개의 기독교 관련 기관이 이름을 올렸다. 숫자로만 보면 무역회사, 가발 업소 다음으로 많다. 한인 이민사는 교회를 빼놓고 논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동문회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경기고, 용산고, 휘문고 등 고교 동문회(18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등 대학 동문회(15개)는 물론 UCLA, USC 등 미국 대학의 한인 동문회까지 설립돼 있었다. 당시 한인사회에서는 37개의 비영리 기관 및 한인 단체가 운영 중이었는데 정치, 경제, 문화, 스포츠 등 분야는 다양하다. 남가주한미정치협회를 비롯한 나성카운티사회봉사부한인지부, 나성의료건강서비스센터, 남가주한인야구협회, 남가주총학생회, 과학기술경영인협회, 한인교향악단, 재미서부태권도협회, 남가주한인교회연합회 등의 단체가 설립돼 있었다.   당시 가주신문사, 기독교신문사, 한미연합신문사, 미주한국어방송국 등 언론사도 다수 운영 중이었다. 미주중앙일보는 한인록 발간 2년 후인 1974년에 창간했다. 인명록을 살펴봤다. 김, 이, 박, 최, 배, 장, 주 등 89개의 한인 성씨를 추려 세대주, 영문 이름, 주소, 전화번호 등이 실려있다. 인명록으로만 무려 160페이지(한인록 25p~185p)를 할애했다. 한 페이지당 약 30명의 정보가 담겨있으니 4800여 명이 기록돼 있는 셈이다. 인명록을 쭉 훑었다. 대부분의 주소지는 LA다. 낯익은 지역도 더러 보인다. 유재풍(풀러턴). 신중현(세리토스), 안채선(샌타바버라), 유완순(롱비치), 윤병욱(하시엔다하이츠), 윤봉수(코스타메사), 이무용(패서디나), 이명원(샌디에이고), 이수녕(터스틴), 이상훈(헌팅턴비치), 이정숙(리버사이드) 씨 등 LA 외곽 지역 거주자도 간혹 눈에 띈다. 동명이인도 많다. ‘김영호’ ‘이영자’란 이름을 가진 한인은 LA지역에서만 각각 8명이 살고 있었다.     ━   광고로 보는 ‘1972’ : 오늘의 ‘페니’는 내일의 ‘딸라’   뉴요크보험회사 광고 문안 다양한 비즈니스 업소 영업   한인록에는 유일하게 한인 변호사로 이름을 올린 ‘케네스 B. 장(Kenneth B. Chang)’이 있다. 훗날 남가주에서 첫 한인 판사가 됐던 고 장병조(1930~1982) 판사다. 검사로 활동하던 장 판사는 한인록이 발간된 1972년 플라워 스트리트 인근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었다.   당시 한인 은행은 한국외환은행뿐이었다. 광고 문구를 살펴보면 ‘달러’가 한국 경제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엿 볼 수 있다. 한국외환은행은 한인록 전면광고(288페이지)에서 ‘교포 여러분의 예금이 조국 한국의 산업 발전에 크게 이바지됨을 고려하시어 많은 이용 있으시기 바랍니다. 예금에 대한 비밀은 절대 보장됩니다’라고 홍보했다. 뉴요크생명보험주식회사의 광고 문구는 그야말로 강렬하다. ‘가정의 기둥인 가장에게 만일의 경우가 생기면 남은 가족의 생활은 어떻게 될 것인가’ ‘어느 날 갑자기 3가지 불행이 있을 때’ ‘자신이 사망하는 것도 슬프지만, 가족에게 경제적 부담을 지우는 것으로써 슬픔 위에 역경을 더하지는 말아야 할 것’ ‘오늘의 페니가 가족을 보호하고 내일의 ’딸라‘를 보장한다.’ 다 같이 자리에 앉아 그릴에 고기를 구워 먹는 독특한 방식의 ‘한국식 바비큐’는 한류 등의 영향을 힘입어 오늘날 타인종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50년 전에도 K-바비큐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당시 크랜쇼 불러바드의 ‘코리아나 바비큐 하우스’는 ‘당신의 테이블에서 곧바로 요리해서 먹을 수 있다’며 한국식 고기 굽는 방식을 광고 문구로 담았다. 가주 관광은 ‘관광의 전당’이라며 전면광고를 냈다. 라스베이거스, 그랜드캐년, 요세미티국립공원, 샌디에이고 시월드, 카탈리나 아일랜드, 옐로스톤 국립공원 등 관광 프로그램은 대부분 서부 지역 중심으로 구성됐다. 한인록에 담긴 ‘유니버샬수튜디오’ ‘그랜드캐뇬’ ‘뻐스대여’ ‘로스휘릿츠’ ‘녹음 테프’ ‘고급 수에터’ 등 당시 외래어 표기도 눈에 띈다. 한편, 지금은 한국에서 진출한 CGV를 통해 최신 한국 영화들을 감상할 수 있다. 5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버몬트 길에는 ‘한국인 극장’도 있었다. 관련기사 315페이지에 담은 50년 전 한인 역사 LA한인회 역사…반세기 세월 넘어 한인사회 대표 단체로 한인 업종 변화…식당 다양해지고 전문직은 더욱 세분화 독자 인터뷰…"읽을거리 없다는 말 듣지 않게 해달라" “업소 장수 비결은 고객서비스와 신용” “중앙일보 광고와 25년 영업 함께 했죠” “가족은 나의 힘…전국 최고 딜러로 우뚝 서겠다” “3대째 가업 잇는 자부심으로 진료합니다” 타운 경제의 산 역사, 디지털로 거듭난다 1972년 첫 업소록, 50년전 우리를 만나다 장열 기자페이지 한인 남가주 한인사회 남가주 한인회 당시 한인사회

2022-09-21

문화재급 유물 환원한 김대영씨 별세

겸재 정선의 ‘선면산수도’, 심전 안중식의 ‘화조영모도십폭병풍’, 운보 김기창의 판화 등 문화재급 유물이 포함된 수백 점의 소장품을 한국 세종시에 무상으로 기증해 화제가 됐던 김대영(사진)씨가 한국에서 5일 오후 6시(한국시각) 별세했다. 91세.   김씨의 여동생 조소영(73)씨에 따르면 김씨는 지난 4월 21일 한국으로 영구 귀국했으나 낙상으로 병원에 입원해 재활 받던 중 의료진을 통해 코로나에 감염돼 응급 치료를 받아왔으나 최근 상태가 급격히 악화했다.     한국 초대 건축가로 동대문, 종각, 비각 등 한국의 문화재 건축물 개보수 전문가로 유명한 김문성씨의 9남매 중 큰아들인 김씨는 경복고등학교에 다니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참전해 통역관으로 근무했다. 당시 공로를 인정받아 김씨는 2002년 한국 정부로부터 금성 화랑 무공 훈장을 받았다.     김씨는 대위로 제대한 후 1956년 미국에 유학 온 후 LA에 정착해 무역업, 부동산업 등 다양한 사업에 천부적인 소질을 발휘하며 부를 이뤘다.     조씨는 “유학 시절엔 당시 남가주의 고급 백화점인 블록스의 광고 디자이너로 스카우트됐을 만큼 미술에 특히 재능이 뛰어났으며 안목도 높았다”며 “사업으로 늘 바빴지만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경매 등을 통해 한국의 미술품이나 도자기 등을 사고 고국이 그리울 때마다 늘 만지고 들여다보며 정성을 쏟았다”고 말했다.     남가주 한인사회에 대한 사랑도 각별해 한인건강정보센터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남몰래 힘을 보태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사망 전 세종시에 회화 144점, 도자 113점, 공예·기타 67점 등 총 324점의 유물을 무상으로 기증했다.     〈본지 8월 19일 자 A-1면〉   한편 김씨의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장지가 결정되는 대로 안장할 계획이다. 장연화 기자문화재급 무상기부 문화재급 소장품 문화재급 유물 남가주 한인사회

2022-09-05

[기고] 50년 전 ‘한인록’에 담긴 이민역사

 1972년 남가주 한인회에서 한인회 창립 후 처음으로 발간한 한인록이 있다. 50년 전 남가주 한인사회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이민역사의 소중한 자료다.     한인록은 남가주 한인회 역사를 간단히 서술하고 있다. 1962년 2월 김호, 김형순, 김원용, 송철 등 독립운동 원로들 중심으로 남가주 한인센터가 조직됐고 초대 위원장에 김호, 부위원장에 송철 선생이 임명됐다.     1963년 2월 24일에는 남가주 한인회관을 구입했는데 주소는 ‘2559 West Olympic Blvd’로 현재의 한인타운 중심지에서 동쪽에 위치했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1967년 건물을 매각하고 추후 건물 구입을 위해 4만 달러 원금을 적립했다.   1965년 신 이민자들이 들어오면서 가주 한인회를 발족했는데 1968년 1월 14일 두 단체가 통합하여 남가주 한인거류민회를 설립했다. 초대 회장에 조용삼 박사가 선출됐다.     한인록에는 4800명의 남가주 거주 한인 명단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름, 주소, 전화번호 등이 적혀 있다.   체육회와 부인회 등 단체들이 이미 조직돼 있었고 특히 18개의 한국 고교 동문회, 15개 대학 동문회, 7개의 미국 대학 동문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가장 많은 단체는 교회로 당시 44개의 한인 교회가 남가주 지역에 설립돼 있었다.   한인록에는 한인이 운영하는 다양한 업종의 비즈니스들이 광고로 소개돼 있다. 광고를 게재한 업종은 여행사, 마켓, 보험회사, 꽃집, 부동산 중개인, 언론사, 식당 등다양하다.   당시 한인들이 가장 많이 종사한 업종은 단연 무역회사로 77개 업소에 달한다. 두 번째는 가발업으로 57개 업소가 한인록에 수록돼 있다. 주유소 42개, 식당 24개, 마켓 20개, 리커스토어 11개가 당시 영업을 하고 있었다. 또한 10개의 여행사, 7개의 미용실, 양복점 (6곳), 사진관(5곳), 자동차 수리업소(5곳), 꽃집(4곳), 인쇄소(4곳), 보석상과 공예품점(각 1곳)이 문을 열고 있었다.     전문직으로 7명의 의사와 3명의 치과의사가 환자들을 진료했고 6개의 한인 신문과 TV 방송국이 한인 사회의 소식을 전했다. 또한 11개의 회계 관련 업소가 있었다.   남가주 한인 사회는 1970년대부터 신규 이민자들이 급증하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는데 1972년 한인록은 초창기 남가주 한인 사회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 50년 동안 남가주 한인사회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엄청난 성장을 거듭해 왔다. 초창기 남가주 한인사회를 이끌어준 ‘올드타이머’들의 노고와 희생 없이는 남가주 한인사회가 오늘날처럼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올해는 4.29폭동 3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지난 30년, 그리고 지난 50년 남가주 이민사를 돌아보면서 한인커뮤니티 미래의 50년 청사진을 새롭게 그려보자. 장태한 / UC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장기고 이민역사 남가주 한인회관 남가주 한인사회 남가주 한인거류민회

2022-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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